인간은 누구나 노동을 하고 있으며, 이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노동이라고 적으니 상당히 사회주의적인 뉘앙스가 있긴 합니다만, 사실 노동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완벽한 원천입니다.

벌써 몇년이 지났는데, 우리나라를 들었다 놓은 책이 한권 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 책은 제목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충분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이 얼마나 철학적이고 지적인 지식인의 글인가!'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정작 청춘들로 하여금 강한 비난을 받게 되었고, '아프면 환자지 왜 청춘이냐?'라는 유명한 반박(Feat by 유병재)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왜 청춘은 아파야 하는것일까요.

 

얼마 전 스크린도어를 보수하는 업체의 직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망한 직원의 나이는 19세.

그의 가방속에서 나온 소지품중에는 800원짜리 사발면 한개와 숟가락이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이렇게 일하는지 알았다면 그만두라고 했을 것'이라고 인터뷰 했죠.

 

우리나라에서 1년간 노동하던 중 현장에서 사망하는 노동자의 수는 약 2000명입니다.

주말 빼고 근로일은 1년에 약 210일 정도(현실은 그렇지 않지만)임을 감안하면 하루에 약 10명 정도가 사망하는 꼴입니다.

이 중 언론이나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사건은 몇건이나 될까요.

몇십일에 한건 정도일지도, 아니면 거의 알려지지 않고 묻히는 것이 대부분일 것 입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런 죽음에 무뎌지고 둔감해 진 것일까요.

 

최저임금을 조사하고 결정하는 곳은 국가의 최저임금결정위원회란 곳입니다.

그런데 경영계라고 회사 운영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이정도 주면 되지요?'하고 제안아닌 제안을 합니다.

나름대로 조사 한 결과라는 숫자 표를 들고요.

얼마 전 '미혼 1인의 월 생계비는 103만원이면 된다.'라고 발표를 했답니다.

그것은 즉, 내년의 최저임금 인상은 없다는 공표 아닌 공표인 것이죠.

저 103만원의 선정 기준이나 내역을 보면 한심하다 못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현재 최저임금은 6000원이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명동교자의 칼국수 한그릇이 8000원이니 이것도 못먹습니다. 김밥천국에서 순두부나 먹으라는 뜻일까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이제 본론에 들어 가 보지요.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생긴걸까요?

위의 사망한 19세 노동자(청년이라는 호칭보다 아직 소년이라는 호칭이 더 적합한 나이인데 세상의 불합리로 먼저 세상을 떠난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가 회사에서

'이 급여에 이런 환경이라면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말을 했다면 그 노동자의 고용인은 뭐라고 말했을까요?

아마도 '그래? 그럼 나가. 너 말고 일하겠다는 사람 쌔고 쌨어'라고 말했을거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서 아버지뻘 되는 다른사람에게 가, '저 이래이래서 그만둘까 합니다.' 라고 이 야기 하면

'야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그냥 다녀서 기술 배워'

라고 말했을 겄입니다.

실제로 위의 19세 노동자가 그만두어도 그 급여, 그 환경에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지켜질 수 있는 것입니다.

2016년 현재의 윗세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 더 낮은 임금에 혹사당하며 청춘을 보냈을 수도 있습니다.

최저임금은 아직 많은 곳에서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높은 실업율이 '너 말고도 일할 사람은 많아'라는 말을 사실로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저는 초/중/고/대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가진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인권'에 대해 거의 배우지 못했습니다.

노동을 거부할 권리, 나의 안전을 우선할 권리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제가 나이가 좀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점점 더 어려워 지는 것 같습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전 세계 경제가 휘청거릴 때에 독일도 이 폭풍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 독일은 다른나라와 달리 '구조조정'이란 단어를 '해고'로 해석하지 않고 '노동시간 단축'으로 해석했습니다.

그 결과 독일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줄어 급여소득은 줄었지만 소비시간이 증가하여 소비경제는 위축되지 않았고,

세계적인 경기불황에서 어느정도 견딜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구조조정'이라는 단어를 '정리해고'라는 단어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정리해고라는 단어를 아주 효율적인 협박 도구로 활용하죠.

'정리해고가 곧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이 회사 안에 퍼지면 모든 사람이 긴장을 하고 일을 합니다.

그리고 소위 '본보기'로 몇사람이 잘려 나가면 남은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쉼과 동시에 '잘리지 않기'위해 더 노력하게 되고

위에서는 이런 노동자에게 더 높은 강도의 노동을 시키게 되며 더 낮은 임금을 지급하려 합니다.

(임금을 낮추지 못할 경우 수당이나 성과급을 깎는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정부에서는 경기부양을 해야 한다며 대기업들에게 직원들 임금 많이 주라고 다양한 세금 혜택을 줍니다.

법인세 감면, 연구소 설립 혜택, 손실 보전 등 셀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혜택의 낙수는 아래 말단 직원들에게 돌아오기 전에 거의 말라서 사라집니다.

결국 남는것은 고용에 대한 불안정과 공포스런 분위기로 형성된 낮은 급여노동자들의 무차별 양산이죠.

 

간신히 생계유지를 할 정도의 급여 수준 때문에 조금만 높은 급여를 주는 곳이 있다면 이직을 해 버립니다.

우리나라의 직장인 평균 근속 기간은 2년 미만, 이직 인구는 약 20% 입니다.

연간 약 300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이 취업과 퇴사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근속기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노동의 숙련도는 높아지기 어렵고, 급여 수준은 쉽게 올라가기 어려우며, 당장 눈 앞의 업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회사도 장기적인 계획을 잡기 어려워집니다.

사회 전반에 펼쳐진 이 게임의 승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우리 사회에 암묵적으로 노동자들을 세뇌시키는 한 문장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제가 20년 전에 처음 마트에 취직해서 일을 할 때 들은 이야기가 저것이었습니다.

19세의 나이에 창고에서 짐을 옮기고 있었는데 중간 간부가 제게 한 이야기죠.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니 이런데서 일을 잘 배우라는 겁니다. 허투른 노동은 하나도 없다고.

그리고 저는 약 1년간 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세뇌되었죠.

어느순간 정신 차리고 보니 제가 저 이야기를 아랫사람들에게 하고 있더군요.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 된 것입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간단합니다.

노동자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급여와 환경이 변하지 않는다면 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너 말고 일할사람 많아'라고 고용주들이 이야기 하면,

'네 그럼 다른사람 뽑으세요'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일자리는 어디엔가 있습니다. (요즘엔 소위 꿀빠는 직장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저는 이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말 일 할 사람이 없다면 위의 고용주는 할 수 없이 조건을 좋게 할 것입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이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노동자의 목소리여야 합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내가 하고있는 낮은 질의 노동은 낮은 급여를 줄 것이다. 그것이 당연하다'에 익숙해 져 있습니다.

'갈데가 없으니까 한다'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누군가가 당신에게 주입시킨 생각은 버리고 자유로워지시길 기원합니다.

노동자들이 저항과 신념으로 뭉쳐야만 스스로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용주들은 피고용인들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차피 고용주도 누군가에겐 '을'이니까요.

반응형

↑↑↑ 한번 눌러주시는 하트는 큰 힘이 됩니다! ^^ ↑↑↑

궁금하신점은 댓글 남겨주세요~!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